아주 우연히도! 내담자와 같은 책을 같은 시간대에 봤는데, 바로 “생존자들”이라는 책이었답니다. 이 책은 원제는 “Good Morning, Monster”인데요, 정말 끔찍한 아침인사에요(책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겁니다).

이 책의 저자 캐서린 길디너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25년간 임상심리학자로 상담을 해왔고, 50세에 은퇴한 이후 작가로 데뷔했다고 해요(아, 나의 워너비인데..).

임상심리학자로 지낸 25년간 잊을 수 없는 4명의 내담자와의 상담 기록을 정리한 책이 바로 이것입니다. 책의 첫머리에, “여기 소개된 영웅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말에 저도 동감합니다.

피터, 대니, 로라, 매들린과 마음이 뒤엉켜서 상담한 내용을 보니 저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어요. 특히 상담자로서실수하는 장면에서는 저의 실수 장면이 오버랩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 내용이 궁금하시죠?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1부 갇힌 마음 : 애착장애, 무성애증 – 피터 이야기
2부 상실과 억압의 벽 안에서 : 자아정체성 박탈, 집단 트라우마 – 대니 이야기
3부 조각난 가족의 구원자 : 아동유기, 방임 – 로라 이야기
4부 안녕, 괴물아 : 강박장애, 가스라이팅 – 매들린 이야기


[내가 상담치료를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왜곡된 시각을 통해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피터가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랐다. 둘째, 그가 지푸라기 집에서 나와 벽돌집으로 옮길 수 있도록 거드는 ‘좋은 어머니’ 역할을 하고 싶었다. 늑대가 와도 안전할 수 있게 스스로 자신의 장점을 볼 수 있도록 거드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나는 그가 늑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피터 창이고 여긴 안전한 내 집이야. 나는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가.”]
p45

수십년간 단 한번도 독하고 해로운 부모에 대해 부정하지 못한 내담자에게 부정해도 된다는 허용은 아주 어렵습니다. 기존의 생각을 허물라고 하는 것은 방어를 더 하게 만들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위험하고 두렵게 하거든요. 그래서 천천히 자아를 튼튼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용기를 주는 것이 상담에서 할 중요한 일이지요.

피터를 상담할 때 저자는 해리 할로 교수의 애착과 관련한 원숭이 실험 영상을 이용했는데, 피터는 주인공 원숭이를 보며 자신을 투사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저도 활용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피터가 한 말 중에 가장 놀라웠던 게 있다. 다시 살아도 무엇하나 바꾸지 않겠다고 한 말이었다. 그가 얼마나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말했다. “제가 다른 집 아이들과 똑같이 컸다면 어땠을까요? 말을 걸어주는 사람 하나 없는 다락방에 갇히지 않았다면요? 위로와 대화와 감정을 표현하는 친구로서 피아노를 의지하지 않았다면요? 그럼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아노에 ‘집착’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피아노 연주가 인생의 가장 큰 낙이었는데, 친구도 사귀고 평범하게 자랐더라면 피아노가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고 했다.]
p85

이 장면에서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고난을 승화시키는 내담자의 힘! 상담하면서 이렇게 고통의 다른 측면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희망을 보게 됩니다.

[대니는 자기 직업에 만족했다. 초원을 달리는 일과 비슷하다고 했다. 혼자라서 좋았고 지도를 보아가며 북아메리카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는 혼자 알아서 일하며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식사 때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현대의 유목민이었다..(중략)..그는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지금까지 수백만 달러 상당의 수화물을 한 번도 도난당한 적이 없었다. 천부적인 재능과 어린 시절에 습득한 경험도 있지만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때문이기도 했다. PTSD가 있는 사람들은 초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위험한 상황을 워낙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주변 환경을 끊임없이 살피느라 면역체계가 쉴 틈이 없다.]
p143

이 책을 통해 캐나다 원주민의 슬프고도 비참한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원주민을 백인화시키는 이른바 ‘기숙학교’에 갑자기 끌려간 대니는 온갖 고통 속에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냉동인간으로 개조되었습니다. 평생을 그런 트라우마에서 살아왔던겁니다.

[다년간 접한 사례를 통해,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어른의 역할을 부여받았고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일에 대해 계속 불안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그 일을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어린 나이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실패의 경험을 내면화한다. 로라는 부모 노릇에 실패했다는 데만 초점을 맞추었고, 버림받은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직무를 유기했다는 뉘앙스 역시 단 한 번도 풍기지 않았다. 모두 자기 탓으로 돌렸다.]
p221

우리가 믿는 굳은 신념이 무너질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낍니다. 그래서 신념을 건드렸을 때 방어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느라 외부에만 신경쓰게 되고 좋은 에너지가 새어나가게 되지요. 이런 부분까지 다 내담자가 인식하게 되려면? 정말 많은 고통을 상담자와 함께 감내해내야 하죠.

저의 상담 경험을 보자면, 내담자들은 문제가 있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가 있고 지혜가 있다는겁니다. 이렇게 말하니 놀랍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살아내왔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놀라운 점이지요.

[로라는 그 집안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구원자 역할을 자처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사실상 적응행동이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상사가 무책임해지도록 용인했다. 아버지에게 그랬듯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의 무의식 깊숙이 구원자가 되려는 욕구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과 그녀가 어떤 식으로 아버지처럼 구원이 필요한 나약하고 이기적인 남자를 잠재의식적으로 선택하는지 깨닫게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p226

상담에서 내담자의 패턴을 읽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러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천천히 신뢰감을 쌓고 상황에 맞게 적절한 개입이 필수적이죠. 그런 노련함이 생길 때 비로소 ‘아, 내가 이제 좀 상담하는구나’하게 됩니다.

[모든 임상심리학자는 첫 내담자를 잊지 못한다. 그건 마치 첫 아이를 낳는 것과 같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거기에 대비할 방법은 없다. 미지의 영역이다. 한때는 이 우주 속에서 별개로 존재하던 두 사람이 치료사와 환자로 만난다. 우리 각자에게 새로운 역할이 생겼다. 기대와 희망에 찬 눈빛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첫 내담자를 맞닥뜨리면 주어진 임무에 따르는 책임감이 나를 강타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건네받았으니 그걸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p270

[나는 물었다. “당신은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동생들은 그러지 못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요?”..(중략) “저는 대장 기질을 타고 태어났어요. 아빠가 그걸 연마해줬고, 자기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애정을 쏟았어요. 그걸로 충분했던 것 같아요. 아빠가 술에 취했을 때 제 도움 덕분에 곤경을 모면하면 잘했다고 칭찬했거든요. 칭찬은 어떤 것이든 도움이 돼요..(중략)..”]
p275

[피터, 대니, 로라 그리고 매들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중략)..
그들은 자신의 내면을 파헤쳐 그림자 안에 숨어 있는 부분에 불빛을 비추었다. 그 어두컴컴한 구석에 숨어 있는 것들을 불빛이 비추는 곳으로 끄집어내 정면으로 마주했다. 미지의 길로 용감하게 뛰어들어 변화를 추구하고 역경을 극복해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공포를 극복하고, 얽매인 것이 안전하다고 착각하며 스스로 부여한 한계를 깨부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모든 자아성찰은 용감한 시도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p374

모든 내담자들에게 박수를!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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