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아 이 책은 올해 최고의 책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정지아 작가를 알게 되어서 정말 반가웠구요. 아, 왜 몰랐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니까.. 작가의 전작을 바로 주문했어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제목이 겹쳐지니까 사실 그렇게 구미가 당기는 책은 아니었어요. 해방일지…아 어떤 의미로 쓴걸까 궁금해서 구매하게 되었죠.
주인공의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삶을 마감한 그 때부터 소설은 시작됩니다. 평생을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주인공, 사회주의자이자 유물론자로 평생 살아온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를 둘러싼 일가친척들, 빨치산 동지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으로 오게 되고 그들이 추모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아버지.

[사회주의자라면서 남의 일은 대충대충 하는 게 사람 본성이라 확신하는 어머니가 아버지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오죽흐먼 나헌티 전화를 했겄어, 이 밤중에!”
또 그 놈의 오죽하면 타령이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중략)..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p102

동네 반장처럼 경조사 및 사건사고에 대해 철처하게 자신의 양심에 따라 뒷치닥거리를 하는 아버지, 그러나 빨치산 빨갱이였다는 낙인으로 투명인간 취급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런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블랙코메디 저리가라하는 씁쓸한 일상이 보기 싫었지요. 아버지가 감옥에 갔다오고 나서부터 옛 시절의 부녀지간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부모님의 세월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꽤 들어갈 수밖에 없는건 인지상정인가봅니다.

[우리 집의 대화는 대략 세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 긴요한 이야기..(중략)..밥 묵을래, 국수 묵을래? 아버지는 밥, 나는 국수, 그러면 국수. 무시밥 묵을래, 그냥 밥 묵을래? 아버지는 무시밥, 나는 그냥 밥, 그러면 그냥 밥..(중략)..
2. 정세 이야기. 내 부모는 눈만 뜨면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주로 어머니가 물었다. 이번에는 누가 되겄소? 아버지는 누구누구, 답했고 대체로 적중했다..(중략)..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미국이 어쩌고, 북한이 어쩌고, 공화당이 어쩌고, 이런 이야기를 일상어로 들으며 성장했다.
3. 빨치산 시절 이야기. 이건 주로 나 모르게 빨치산끼리만 속닥거렸다. 물론 좁은 집이라 그래도 다 들렸다..(중략)..
이렇게 말하고 보니 우리 가족이 별로 말을 나누지 않은 것 같겠지만 천만의 말씀. 다만 그 말이 공적이고 논리적이고 정치적이었을 뿐이다.]
p121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p231

[“할배가 그랬는디, 언니가 여개서 썽을 냈담서? 할배가 아줌마 궁뎅이 두들겠다고?”
아무튼 아버지는 제 허물로 제 입으로 까는데 선수다.
..(중략)..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싼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p265

작가는 “쉰 넘어서야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되고,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으며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성장하고자 하면 할수록 앞만 달릴 가능성이 크지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과감히 삭제하고 방어하고. 다시 재해석할 준비도 없이 세월을 맞이하게 되죠. 부모 세대를 이해하는 것, 그건 어쩌면 내적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부모세대가 준 것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저는 이 책으로 행복해졌어요.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 느낌이 났거든요. 여러분도 꼭 한번 읽어보시길, 특히 386세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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